필자는 1985년부터 1988년까지 군대생활을 하였다.
첫해는 xx군단 특공부대에 근무하였는데, 대대훈련시에는 군의관이었던 필자가
항상 참가하였다. 당시 우리부대는 적침투훈련이라고 해서 해안가에서 거의 한달간
야영을 하며 해병대처럼 갖가지 해안침투훈련을 하였다. 그런데 훈련장소가
그 유명한 서해의 "제부도"였다. 경기도 화성 서신면의 끝자락에 붙은 송교리에서
바닷길로 약 2 km를 가면 나타나는 작은 섬이었는데, 그 때에는 일반에게 공개가
되지않아(군통제하에 있었던 듯) 몇몇 마을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땅콩과 벼농사를
하면서 오순도순 살아가는 이름 없는 섬에 불과하였다. 지금은 잘 알려졌다시피
이 섬은 전라도 진도섬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으로
소문나 하루에도 수많은 외지사람들이  찾아드는 관광지로 탈바꿈하였다.

제부도 가는 바닷길은 하루에 두번씩 썰물 때만 바닥이 들어났다.
필자가 훈련을 받았던 해가 1985년 이었는데  이때는 마을사람들이 돌을 깔아서
좀 엉성하긴 하지만 차가 간신히 통과할 수 있는 돌길로 되어있었다.
군의관은 환자가 없을 때에는 별로 할일이 없지만, 만약 급한 환자라도 발생하면
이곳이 섬이기 때문에 배를 사용할 수 없는 우리 육군으로서는 오직 바닷길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하루는 급성맹장염이 의심되는 환자가 의무실을 찾았다. 의무실이라고 해야
천막막사였고 시설이라고는 응급처치용 집기가 전부여서 큰 수술을 해야하는
경우에는통합병원으로 후송하였다. 그런데 환자가 너무 고통스러워 했다.
급기야는 응급후송을 해야 하는 처지였는데, 문제는 바닷물이 점점 차오르는 때인
밀물로 바꿨다는 사실이다. 이곳 제부도와 서신사이의 바다에는 해마다 바닷길을
건너다가 실족하여 물에 빠져 죽는 사람들이 있을 만큼  이 바닷길은 위험하기로도
소문이 나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군의관으로서 책무에 충실하고자 앰블란스를 타고
수도통합병원으로 달렸다. 이미 바닷길은 바닷물로 찰랑찰랑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길은 약 2.4km이지만 무척 꾸불꾸불하여 서행할 수 밖에 없는 길이었다.
기분은 마치  물위에 차가 떠서 가는 느낌이었다. 언제라도 저 바닷속으로 차가 밀려
들어갈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멀리 해안선 밖은 어둑어둑 해가 기울고 만에 하나
낡은 이 차의 엔진이 멈추기라도 하는 날에는 환자를 업고서라도 서신까지 달리는
도리 밖에 없는 급박한 순간이었다. 내 생전에 이 2 km로 밖에 안되는 길이 이토록
멀고 길게 느낀 적이 없었다. 손에 땀을 쥐고 가슴은 쿵덕거렸다.
그러나 천우신조로 마지막 해안선에 무사히 닿았을 때에는 아예 차가 술취한 사람처럼
바퀴가 헛돌고 기우뚱거리기까지 했는데, 운좋게 끝까지 도착하였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절로 감사의 기도가 나왔다. 그 환자는 그렇게 해서 무사히
수술을 끝내고 건강하게 원대복귀 하였다.

또 하루는 앰블란스로 섬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횡단하는데, 굳이 운전병이
좁은 논길을 가로 질러가기를 원하여 그러자고 했는데 결국 바퀴가 스르르 힘없이
논 바닥으로 빠져버리고 말았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난 어처구니 없는 운전병과
의무병의 행동이었다. 차가 논두렁에서 구르면 당연히 상관인 군의관을 먼저 구출하는 것이
군예절일텐데 두놈들(?)이 동시에 무슨 용수철처럼 잽싸게 튕겨 나가듯이 탈출하여
차가 내 쪽으로 더욱 쏠리면서 논에 제대로 처박히고 만것이었다. 그런데 이 두놈들은
밖에서 발만 동동 굴리고 있는게 아닌가!  의리라곤 털끝 만큼도 찾아볼 수 없음을
나는 그 사건을 통해서 깨닫고 그 다음부터는 아예 이들을  믿지 않기로 했다.
나는 군대시절동안 몇번이나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군운전병은 늘 요주의 대상이기
때문에 졸거나 난폭운전을 하지 않도록 철저히 교육시켜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

군대내에서는 심심찮게 폭력사건이 일어난다. 특히 특공대라서 그런지 사용하는
언어들도 거칠고 주먹질, 발길질이 예사였다. 결국 필자에게도 일은 터지고 말았다.
하루는 허리가 아픈 병사가 의무실로 찾아왔다. 좀체 허리를 쓰지 못하는 것을 봐서
척추가 다친 것 같았다. 척추뼈가 부러지면 바로 후송하는 것보다는 우선 안정을 취하고
눕혀두는게 더 낫다. 적어도 급성기를 벗어나는 2~3일은 지나야 어느정도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고 화장실도 갈 수 있다. 더군다나 여기는 외딴 섬이 아닌가!  X-선촬영을
해볼 수도 없고 물리치료를 해볼 도리도 없다. 그런데 이런 나의 치료를 불만족스럽게
지켜보던 상급 장교 한사람이 자기는 늘상 대대장에게 혼줄이 나지만 평소 대대장과
늘 가까이 지내고 각별한 대우(?)를 받던 나에게 무슨 섭섭한 감정을 품었는지 어느날
내가 곤히 자는 야밤에 술에 취해 나에게 결코 있어서는 안될 폭력을 행사한 것이었다.
불의의 습격이라 대항도 못해보고 억울하게 당했다. 참으로 어이없었다. 군내폭력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필자 스스로 폭력을 당해보니 누구에게 딱히 하소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복수를 하기도 그렇고  일단 군내평화를 위해 나는 꾹 참기로 했다.
훗날 가해자는 그날 일에 대해 여러번 사과를 했지만, 가슴에 한이 맺힌 필자는 점잖게
그들을 응징하였다. 군단의 의무실장으로 직책을 바꾼 필자는 다음해에 그 대대에
군의관을 죄송하지만 공석으로 만드는데 일조를 하게 되었다. 마침 군의관숫자가 한명이
부족하던 차에 인사과장이 나에게 인사조언을 요청하기에  "특공 1대대는 워낙 의무교육이
잘되어 군의관이 없어도 잘 할 수 있다(?)" 고 대답했고, 결국 내가 있던 1대대는
무의촌부대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병의 아픈 곳을 어루만지는 착하고 유능한 군의관에게
주먹을 휘두르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똑똑히 가르쳐주는 사례였고 이 일은 오랫동안
군대내 폭력, 특히 장교간의 폭력을 엄단하는 계기가 되었으리라고 본다.
그 대대는 1년이 넘도록 군의관구경을 못해 보았던 것이다.

당시 제부도에는 민간인들의 출입이 통제되던 시절이었다. 해안 바닷길 입구에는 헌병들이
지켰고 모든 출입상황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래서 외부인이 섬으로 들어오는 경우는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필자는 그때  틈틈히 시간을 내어 마을 사람들에게 무료진료도
해주었는데 그곳을 떠날 때 섬사람들이 고맙다고 땅콩을 몇 되나 담아주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제부도 해안선 앞 쪽으로는 서해의 바다가 펼쳐져 있고 멀리 바윗섬들이 몇개 보이고
잔잔한 파도가 해변 모래사장을 치는 모습을 보면 마치  영화  "파라다이스" 의 한 장면
같은 곳이기도 했다.

섬을 벗어나면 서신면인데, 당시에 xx다방이 있었고 뱃길이 채열리지 않으면 그 곳에서
차를 마시고 바닷가의 짠 내음을 커피향에 섞어 들이키는 멋은 지금도 아련하게 그립다.
서신면을 따라 올라가면 사강이 나오고 남양면이 나타는데 시골 이지만 군생활 중인
필자에겐 이런 읍면들이 한편으로는 군생활의 어려움과 고독함을 달래주는 곳이기도 했다.

수원역 지하도를 돌아, 비봉에서 길을 바꿔, 바다로 가는 길을 제대후에 한번 가족들과
같이 가보았는데 너무 많이 상업화되어 옛날의 정취를 조금도 느낄 수 없어 서운하기도 했다.
모두 다 지난 일들이고 이젠 추억으로만 남아있는 필자의 군의관시절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