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이 쨍쨍 내리 째는 한여름 시골에 가면,
마을어귀의 큰 고목 아래에서 부채를 흔들며 이야기를 나누는 한무리의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아침 일찍 논밭일을 마친 할머니들이다.
할머니는 시간이 나면 둘러앉아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타고난 이야기꾼들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 필자는 Korea Herald지를 정기구독하였는데 어려운 영어공부를 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그 신문에 유명한 “앤 랜더스(Ann Landers) 칼럼”이 고정적으로 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계 유대인으로 미국에 건너와 1955년부터 무려 40년간 전미국의 평범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살아가면서 생기는 가족간의 갈등,부부간의 애정문제,질병,금전문제,친구간의 고민거리..등등
하루에도 수천통의 편지를 받아 자상하고 평이하게 다소 유머스러하게  해법을 제시하였다.
칼럼에 실린 여사의 사진도 활짝 웃는 모습인 앤 랜더스씨는 세상에 가장 지혜롭고 속 시원하게 세상살이 이야기를 해주는 할머니였다.

또 여기에 뒤질새라 무려 25년간 21권의 대하소설을 쓴 박경리(1926~2008)작가가 있다.
조선시대 말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하동 평사리 5대지주 최참판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
역사와 더불어 사회문제,계급간의 미묘한 갈등,권략과 재물을 탐하는 사람들의 부침,사랑과 증오,헌신과 배신등,...
수많은 이야기거리들을  박경리할머니(탈고할 1994년 당시 69세)의 말솜씨로 책으로도 드라마로도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부부가 바쁜 경우 아이들은 할머니의 손에서 키워진다.
할머니는 아이를 재울 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동화도 좋고 할머니가 만든 이야기도 좋다.
이때 할머니는 창작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요리해준다.
나날이 이야기는 살이 붙고 가지가 쳐져 한편의 소설이 되기도 한다.
잘 들어주는 손자손녀가 있는 할머니는 행복하고 치매까지 예방할 수 있으며 노인우울증이나 외로움,무료함,소외받는 느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할머니는 빡빡한 가정에서 완충적인 공간의 자리를 만들기도 한다.
엄마로부터 혼이 난 아이가 조용히 찾는 곳이 할머니 방이다.
도피처가 되기도 하고 미처 부모와 나누지 못한 긴한 인생상담을 할 수 있는 곳이 또 할머니 방이다.

할머니는 늘 부자이기도 하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할머니에게만 가면 주머니에서 귀한 용돈이 나오기 때문이다.
어느 가난한 집의 아이가 수학여행 전날 밤 밤새 슬프게 운다.
여비가 없으니 그냥 가지 말라는 엄마의 말 때문이다.
그런데 한 밤중에 조용히 할머니가 와서 꼬깃꼬깃 접은 돈을 손에 지어주는 것이 아닌가!
또,어렵게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등록금이 없어 한탄하던 손자에게 할머니의 쌈짓돈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할머니의 보따리는 퍼내어도 끝없이 나오는 요술보따리다.

어릴 때 여름방학이면 놀러갔던 외할머니집...
그 곳은 엄마의 고향이다.
엄마가 처음으로 엄숙함을 벗어 던지고 언니처럼 막 행동하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한숨 자고나면 수박이며 풋과일을 한바구니 가져온다.
할머니는 잘 안아 주기도 하고 머리를 잘 쓰다듬어 주기도 하여 매우 부드러운 추억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겨울에 간 할머니집에서는 연신 군고구마가 뜨거운 김을 내 뿜으며 밥상위에 오른다.
겨우내 묵힌 맛있는 김치며,호박죽이며,고구마전....시골맛은 곧 할머니 손맛이고 사랑과 정성의 맛이다.

갓난아이일 때 할머니는 아기를 등에 엎고 자장가를 불러 주신다.
늘 엎고 키우느라 할머니는 “꼬부랑할머니”가 되었다.
할머니의 머릿카락은 뿌옇게 변하고 피부는 쭈글어지고,팔다리의 기력은 많이 쇠락했다.
목소리도 힘이 빠져 먼 곳에서는 손만 흔든다. 할머니라고 크게 불러야 겨우 고개를 흔들만큼 귀도 어둡다.
그래서 할머니는 사람의 일생을 자연스럽게 가르친다.
아, 저렇게 늙고 병들어 가는구나. 인간은 저런 일생을 거치는구나.
먼 앞날을 미리 교육해주는 산 교육장이 할머니와의 생활이고 그래서 늙음과 죽음을 자연스레 받아드리게 된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생로병사를 어릴 때부터 체념적으로 배우는 것이다.

서양의 할머니는 마귀할머니가 되기도 하고 요술할머니가 되기도 한다.
신데렐라(Cinderella)는 요술쟁이 할머니를 등장 시키고 백설공주와 난장이에서는 마녀할멈을 나타나게 한다.
그래서 기적과 계급의 상승에 무한한 능력을 가진 요술쟁이 할머니가 어렵잖게 나타나고
아름답고 예쁜 공주를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귀할멈의 존재로 어린이동화를 재미있게 하기도 하는 것이다.

할머니는 인생의 마지막길에 있다.
눈은 침침하고, 기억은 가물가물하고,팔다리는 후들후들,..모든 호르몬은 생산이 바닥으로 떨어지고,서서히 외로움과 우울함,소외되는 괴로움...등으로 늘 힘든다.
근육통과 두통은 늘 따라 다니고 잔병치레도 잘 한다.
그러나 할머니는 생의 석양길에서 풍부한 지혜와 요령,사물에 대한 판단력,인내력,용서심...등도 동시에 가진다.
할머니는 삶의 노하우도 무궁무진하다.
마치 하루에 수천명의 애독자들의 하소연을 일일이 읽어보고 나름대로 답변했던 앤 랜더스여사와 같은 인생상담가로서,
또 끝없는 세상이야기로 수십만장의 원고로 이야깃글을 썼던 토지의 박경리여사같은 인생작가로서 할머니의 위대함은 늘 우리 이웃,가족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할머니를 아름답고 고귀하게 마지막 인생길을 걸어 가도록 모셔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