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외과 선배님이 돌아가셨다. 중국의 고전작가 임어당의 "끽연애찬가"를
너무 좋아 한 나머지 살아 1만갑의 담배를 피우지 못하고 죽으면 살아서도
무슨 삶의 의미가 있겠냐던 분이 셨는데 결국 폐암으로 세상을 하직 하시고 말았다.
그 선배님이 젊었을 때 병원을 운영하시면서 겪었던 일화다.

하루는 30대 남자 맹장염 (급성충수염) 환자를 수술하고 입원 시켰는데,
이 충수염은 특별한 합병증이 있거나 환자상태가 중하지 (충수가 터져 복막염이 되거나
패혈증에 빠지면 사망의 위험 증가 함) 않으면 대개 수술후 7일 쯤, 실밥을 뽑고 퇴원하는 게 보통인데,
이 환자는 무슨 연유인지 일주일이 지나고 수차례 퇴원해도 된다고 일러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퇴원할 기색을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입원실에 가서 자초지종 계속 병실을 지키고 있는 까닭을 물어보려고 막 병실 문을
열려는 순간,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나길래 잠시 들어보니 집안사정이 참으로 딱하여 입원비를
내지 못하여 울며겨자 먹기로 병실에 갖혀있는 셈이란 걸 알게 되었다.

요즈음 같으면 병원도 옛날처럼 여유가 없어 환자의 어려운 사정도 모른체 하겠지만
이 선배님은 너무도 마음이 착하셔서 원장실에 되돌아 와 그 입원환자의 처지를 생각하니
맘이 편할 수 없었단다. 그래서 한참을 궁리한 끝에 그 날 간호사들이 돌아간 뒤
원장이 병원 출입문 (평소에는 입퇴원 관리 때문에 밤에는 문을 담음)을 살짝 열어 놓았단다.
그리고는 잠시 병원을 비웠단다. 그리고 나서 밤 늦게 병원에 다시 돌아오셨다는데 아니나다를까
그 병실에 가보니 환자는 사라지고 곱게 개어놓은 환자복과 종이 한장만 덩그렇게 남아 있었단다.
"원장님, 죄송해요. 제가 급한 사정이 생겨서...." 라는 글귀와 함께. 원장은 그 종이를 들고 한참을 서 있었단다.
얼굴에서는 오히려 빙그레 미소를 피우면서...

그리고는 세월이 흘러 그 사건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그 이듬해인가 어느날 그 환자의 아내되는 사람이
머리에 뭔가를 잔뜩 이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원장실을 찾아왔단다.
그리고는, "원장님,그 때는 우리 사정이 너무 형편없고 달리 방도가 없어서...그만...죄송해요...용서해주세요..."
연신 고개 숙여 절하면서 밭에서 막 캐온 고구마랑 그리고 꾸깃꾸깃 누런봉투 하나를 내 놓더란다.
놀랍게도 당시 5~6만원하는 진료비(지금부터 30~40년 전)를 곱으로 계산하여 10만원을 넣은 돈봉투를
거의 던지듯이 두고 몇 번 인사를 하고는 사라졌단다. 원장은 말을 걸 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서
처음에는 다소 당황하였는데, 그 봉투를 집어들고, 지난 해의 그 때를 다시 기억해보고는, 조용히 가슴벅찬 미소를 지었단다.

선배님은 이 이야기 말고도 비슷한 진료실 에피소드를 가끔 들려 주시고 하셨는데,
"요즈음은 병원도 너무 각박해. 옛날같은 인간 사는 맛이 없어졌어" 라고 쓴 웃음을 흘리곤 하셨다.
그 선배님이 담배를 물고 연신 손가락으로 담뱃재를 털면서, "김원장은 아직 멀었어.수가 짧아..." 라고
하시면서 바둑을 나와 같이 두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