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이 날이 다가오면 우리 고등학교 졸업반 (3학년5반,그래서 석다회) 동창들은
고3때의 담임선생님에게 당시 반장이던 나를 대표로 해서 해마다 인사를 한다.
작지만 성의표시로 선생님통장에 얼마를 부친다.
이제 선생님 연세도 80이 다 되셨다.
담임선생님은 영어를 가르치셨는데 3학년이 되면서 우리 반을 맡으셨고
당시 성적이 가장 좋았던 나에게 반장을 맡기셨다. 선생님은 박봉에
생계수단으로 당시 야간 학원에 다니셨다. 그래서 종례는 반장인 내몫이었다.
나는 줄곧 1등을 하였는데, 가을이 접어들면서 갑자기 열병(熱病)으로
건강이 나빠져 학교를 쉬게 되었다. 심한 열과 두통, 이따금씩 쏟아지는
코피로 인해서 수업 중에 결국 선생님이 나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부산이 객지였던 나는 부모님과 연락이 닿지 않아 선생님께서 직접
학교 선배병원으로 데리고 간 것이었다. 그런데 치료를 충분히 하지 않은
탓인지 회복이 더디고 급기야는 심한 두통등으로 또다시 선생님이
나를 이번에는 신경외과 선배병원에다 데리고 갔고, 그곳에서 입원하게 되었다.
그 때가 10월경이었고 고3때 였으니 나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그 곳에서부터 나의 인생은 엄청난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학교는 영남제1의 명문으로 한해 서울대학교만 130여명이 들어갔고
나는 그곳에서 항상 10등안에 들었다. 특히 수학은 늘 1등이었다.
그러던 나에게 발병(發病)은 상상을 초월하는 충격이었다. 예비고사시험 때는
잠시 틈을 내어 병원에서 나와 시험을 쳤으나 내가 원하던 서울공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하기에는 좀 어려운 성적이었다. 그래서 결국 대학진학을 포기했다.
그해 우리 동기들은 서울의대만 12명이 들어갔고 우리반에서도 서울대에
10수명이 들어갔다. 학교 대표로 서울공대 수학경시대회도 나가고
늘 전교에서 10위권을 유지했던 나에게는 삶에 대한 의욕마저 깡그리
뺏어가는 최악의 상황이 전개된 것이었다.
사실 나는 그로부터 2년이란 세월이 흘러 대구의 경북의대에 들어갔다.
물론 차석으로 입학하긴 했으나 고3때 원래의 나의 진학목표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암기위주의 의과대학을 무사히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전문의가 되었고 강남에서 15년간 개업을 했으며 최근에
서초구에 다시 이전개원했다.
나는 지난 시절을 회고해 보면 참으로 많은 아쉬움을 느낀다.
1970년, 나의 고3 시절, 내가 처음 찾은 병원에서 제대로 진단치료하여
깨끗이 완치하였다면 아마 무난히 내가 그렇게도 들어가고 싶었던 공대에
들어가 공학도로 지금쯤 내나름의 업적을 남겼을 것으로 자부한다.
나는 수리(數理)방면에는 영남최고의 천재였기 때문이다. 외우기는 죽기 보다
싫어했던 내가 의대생이 되다니..아무리 생각해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두번째 병원에서라도 좀더 성의있는 치료를 받았다면 퇴원 후
무려 2년이 넘는 후유증치료를 위한 투병생활에 내 젊음을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늘 내 뇌리를 맴돈다.
한사람의 환자에게 일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무서운 영향력이 의사에게
있다는 것을 나는 10대때 벌써 체득한 셈이다. 의사가 된 후로 나는 나의 고3때를
절대 잊지 않는다. 어린 학생들이 오면 곧잘 나의 10대때 얘기를 들려주곤 한다.
한때 실패한다 해도 결코 자포자기하지 말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나같은 10대가
또 생기지 않도록 이제는 의사로서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나의 한번의 오진과
무성의가 한 환자를 한평생 절망의 구렁텅이로 내 몰 수 있다는 것을...
철저히 머릿속에 각인시켜 두고자 한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40여년 전, 환자였던 내 이야기를 해 본 것이다.
그리고 그 때 부모처럼 나를 열심히 병원으로 데리고 다녔고 나를 잘 봐 반장으로
그리고 수시로 격려해 주었던 당시의 담임선생님을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기억코자 하는 것이다.
"이제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매년 송금하는 것을 말함).
서울 아들한테 올라오다, 네 전화를 받았다. 병원 잘 되고(있는지?)...."
선생님의 목소리는 아직 그때 그 목소리다.
........................... 선생님, 그 때, 너무 감사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