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 근처에 지하철 공사가 한창이던 80년대의 일화다.
그 날도 대학병원의 외과의국에서 당직을 서고 있었다. 외과당직을  서면
늘 바쁜 밤을 보내게 된다. 저녁 5시경 회진을 돌고, 간단히 저녁식사를 마치고 
의국에서 잠깐 쉬고 나면, 13층 도서실에서 다음날 발표할 세미나자료를
뒤적이기도 하고, 밀린 차트를 꼼꼼히 채우기도 한다. 응급환자나 중환이 없으면
편하게 야간을 보낼 수도 있지만 응급실에서 호출이 오기 시작하면 그 날 밤도
만만치 않게 된다. 거기다 중환자실(S-ICU)에 생명이 위태로운 중환이
누워있으면 오히려 낮시간 보다 더 바쁠 수도 있다. 대개 당직은 2명이 섰는데,
초보의사와 경력의사(수련의), 그리고 인턴, 도합 3명이 선다. 외과에서는 1년이
엄청 차이난다. 군대말로 "잔밥"차이가 1년이면 하늘과 땅 차이다.
그만큼 1년만 지나면 수많은 환자경험과 노우하우로 거의 전문의 뺨치게 된다.
그래서 한해라도 먼저 외과에 발을  들여 놓은 선배는 거의 하느님 모시듯이
깎듯이 대접을 받는다. 원래 외과계통은 선후배의 위계질서가 엄하다.
1년차는 감히 3, 4년차의 앞에 서는 것 조차 두려울 정도다. 죽으라면 죽는
흉내라도 내어야 이 계통에서 온전히 살아 남을 수 있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흘러
최근에는 외과지망생이 줄어 과거의 화려했던 외과의국 전통은 온데간데 없고
몇명이 초라하게 의국을 유지하고 있단다. 앞으로 언젠가는 외과가 사라질 지도 모른다.
아무도 힘들고 어려운 외과를 지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날은 날씨도 흐리고 밤이지만 병원 근처의 명동 밤거리도(병원에서 길 건너면 명동)
우중충하였다. 저녁을 일찍 먹고 2층 침대에 잠시 몸을 누이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응급실에서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남대문 지하철공사장에 응급환자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직의사가 직접 가 봐야 될 것 같다는 이야기고, 지하철공사장을 지나던 취객이
실수로 수십미터 공사장아래로 추락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환자가 공사로 세워 둔
철근에 온몸이 꼬챙이에 박히듯 박혀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응급상황인 것은 확실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앰블런스를 타고 추락현장으로 갔다.
당시에는 아직 119 응급후송시스템이 오늘 같이 완벽하지 않아 당직인 내가 추락지점까지
내려가서 환자후송을 직접 지휘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환자는 의식이 있었고 아프다고
소리소리 질렀다. 박힌 철근을 빼보려고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고 자칫 잘못하여 뺀 뒤
출혈이라도 심해지면 생명에 위험할 수 있어 철근을 톱으로 몸에 박힌채로 잘라서 환자를
일단 지상으로 올렸다. 그리고는 즉시 병원으로 옮겼고, 응급처치와 x-선 촬영후 혈관확보
(링거액등을 주입)를 하고 바로 수술실로 직행했다. 전신마취 후에 몸에 박힌 철근을
모두 제거하는 수술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양쪽 허벅지와 팔에 철근이 꽂혔는데
다행히 깨끗이 제거하고 터진 근육은 봉합하여 수술은 무사히 빨리 끝냈다. 그리고 그 환자는
별다른 후유증 없이 2주 뒤에 퇴원하였다.

지금 돌이켜 보면 무슨 액션영화의 한 장면같이 그때의 모습들이 시시각각 잊혀지지 않고
마치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처럼 생생히 기억난다. 지금 같아서는 공사장은 철저히
덮어두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추락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그 당시에는 아직 지하철공사의
초기단계여서 그런지 이같은 사고가 가끔 발생했던 것 같다. 요즘 같으면 kbs 9시 뉴스에 대문짝처럼
크게 자막이 흐르면서 방송 될 사건이겠지만 그날 그일은 그렇게 해서 아무도 모르게 일단락 되었다.

사실 다친 환자도 그 당시에 상상할 수 없는 고통과 두려움을 느꼈겠지만, 현장에서 이런 사건을
난생 처음 접해 본 필자 역시 처음에는 대단히 놀랐고 당황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외과의사가
어떤 사람인가! 아무리 위급하고 어려운 상황이라고 해도 결코 당황하거나 서둘러서는 안되지 않는가!
오히려 그럴수록 찬찬히 생각하여 실수없이 완벽하게 환자를 구출해야 한다. 조심스럽게 접근하되
일단 치료에 응하면 단호하고 빈틈없이 끝내야 한다. 나는 그날의 응급구조를 무사히 끝낸 것을
지금도 조그만 보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환자를 한번 쯤 다시 보고 싶기도 하다. 아직도 애주가 인지...
어쩌다 황천길이 될 뻔한 수십미터 지하철 공사장으로 떨어졌는지...
꼭 한번 물어 보고 싶은 장난끼가 발동하는 것을 어쩌지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