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은 의과대학시절이 힘들긴 해도 가장 즐거웠던 시절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필자 역시 의대시절을 되돌아 보면 너무도 많은 일들로 즐거웠다기 보다는
혼란스러웠다는 표현이 맞을 그런 시간으로 기억한다. 입학에서부터 졸업까지 사실
순탄하지는 못했다. 나는 고교시절 촉망받는 수재 쪽이었는데, 고 3때 불시에 찾아든
병마로 내 희망이었던 S대 공대는 다녀보지도 못하고 낙향하는 불운을 맞았다.
그
러나 고향에서 힘든 투병생활을 마친 어느날 불현듯 재기에의 욕망으로 진로를 바꾸어
의과대학을 지망했고 이런저런 사유로 대구 K의대에 힘겹게 입학했다. 그러나 그 당시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집안에서는 학비는 고사하고 생활비도 타다 쓸 수 없는 곤궁한
처지에 빠졌다. 나는 의과대학공부와 학비를 버는 독학생으로서 이중생활을 하며
의대를 다닐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의대공부는 그 양이 방대하고 본과 4년이 생각보다는
짧아 단시간에 엄청난 의학지식을 섭렵해야 하는 힘든 과정이다. 공부만 해도 혀를
내두를 만큼 바쁘고 정신없는데 따로 시간을 내어 학비를 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공부와 일을 양립시키는 것이 참으로 고되고 힘들어 진다.
의대공부는 대부분 암기해야 하는 것이므로 절대적으로 공부하는 시간에 비례해서
성적이 나올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한 나에게는 자칫 치명적일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어려운 상황에서 급기야는 도중에 추락하는 비극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로인해 나는 극심한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나는 중학교나 고교시절 학급이나 학교전체에서 1%미만에 늘 드는 우등생이었고
단 한번도 등록금을 낸 적이 없었는데, 전국 최우수 의대도 아닌 곳에서 나는 비참하게도
나쁜 성적으로 남들의 눈치를 보는 위치로 곤두박질 쳐진 것이었다. 이 때 나는 많은
고독과 어려움을 겪었다. 나를 아껴주던 동료나 선배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은 물론
무엇보다도 의대는 치열한 경쟁사회인데 그런 성적위주의 집단 속에서 열외로
쫓겨난다는 것은 사실 장래의 희망은 물론 의사로서의 모든 기대가 허물어지는
그런 최악의 상태에 빠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고학을 해야하는 내 운명은 다시 스스로를 추스려 재기하는 것만이 유일한
탈출구란 것을 가르쳐 주었고 나는 다시 이를 악물고 외로운 재활에 뛰어들었다.
학비마련은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급기야는 등록금을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무엇보다 하숙비니 자취생활비를 마련하는 것이 하루하루가 어려워 졌다.
어떨 때는 심지어 라면 한상자로 한달을 버티기도 하고 아예 그 라면마저 없어 일주일을
물만 먹고 버틴 적도 있었다. 당시 네 체중은 지금에 비해 20KG이나 적게 나갔는데
당시 내 사진을 보면 얼굴은 해골 같았다. 내 주위에서는 내가 제때 못 먹어서 그러리라고는
전혀 낌새를 차리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좀체로 나의 힘든 모습을 내색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래서 그 흔한 미팅이니 야간술집
같은 곳에는 엄두도 내지 못했고 매일매일 끼니 걱정과 다가오는 등록금 걱정으로
날밤을 고민하며 보낸 기억 밖엔 없다.

그러나 어느날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하숙비를 도저히 마련할 길 없어서 길거리에서
노숙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으로 내 몰렸던 것이다. 나는 학교 도서관 주위를 방황하며
며칠을 야숙할 채비를 차려야만 했다. 배는 고프고 밤이슬을 맞으며 뜬눈으로 학교 앞뜰을
하는 일 없이 어슬렁거려야 하는 나는 정말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사는게 이렇게 비참할 수가
없었다. 하염없이 눈물이 내 뺨 위로 흘러내렸다. 그 당시 내 몸에 또 이상징후도 나타났다.
온몸의 관절이 쑤시고 걸을 때나 팔을 들 때도 힘든 것이었다. 아마 너무 굶고 힘들어
몸의 저항력이 극도로 저하되어 류마치스관절염 같은 게 생긴 것 같았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 흔한 아스피린 한알 사먹을 돈마저 없었던 것이다!  몸은 곳곳이 쑤시고 뱃 속은 꼬르륵 거리고
초가을이지만 밤기운은 차고....결국 나는 마지막으로 친구를 찾았다.
"YN아, 내가 좀 사정이 곤란해서 그런데...돈 좀 빌려..." 죽을 힘을 다하여 용기 백배하여
모기소리로, 내 생애 처음 통사정을 한 것이다. 그런데 친구는 당장 학교를 찾아왔고, 조용히
웃으면서 꾸깃꾸깃 낡은 지폐를 나에게 건네 주었다. "그냥 주는 것이니...넣어둬요. 나 갑니다
(이 친구는 내가 나이가 많다고 나에게 경어를 썼다)" 나는 그 돈을 한참을 보았다.
이제는 살았다는 안도감과 고마움, 그리고 이런 내 처지가 너무도 불쌍하여 한없이 눈물을
훔쳤다. 다행히 그렇게 하여 나는 그때의 위기를 극복하였다.

이럭저럭, 의대 4학년이 되어 국가자격시험을 서울에서 치르게 되었다. 이제 의사되는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서울 갈 여비가 없었다. 내일이면 서울로
가야 하는데 내 수중에는 한푼도 없었던 것이다. 나는 온갖 지혜를 짜서 궁리해 봐도 뾰족한
대책이 서지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비상금으로 쓰라고 금가락지를 한개 준 것이 있었다.
그래서 친구와 함께 부랴부랴 대구 중앙통 금방에 가서 그 반지를 내놓았다. 그러나 이리저리 보고
내 얼굴을 뚫어져라 훑어보고는 보증서가 없어서 안된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이었다. 같이 간 친구도 그때 나를 흘낏 보는 눈치가 평소와는 달랐다.
반지를 훔치기라도 한 듯이 의심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그 친구를 뒤로하고 내가 자주 갔던
전당포를 찾았다. 이미 내 수중에는 시계도 만년필도, 돈 될만한 것은 죄다 이곳에 있었는데,
나의 마지막, 그것도 아버지가 꼭 필요할 때 쓰라고 주신, 최후의 내 재산을 맡기고 서울 갈
여비를 마련할 수가 있었다.
나는 그 이후 ECFMG (미국의사자격증시험)도 치러 좋은 성적을 받았으나 추가비용 부족으로
미국 갈 자격확보에는 실패했다.

지금 되돌아 보면 내 의대학창시절은 인간의 기본생활을 유지하는데 전력을 바친 시기였다.
그러나 나는 그 어려운 때에도 지금의 아내와 사랑도 나누고 봉사활동도 하고 책도 많이 읽고
운동도 열심히 하였으니 어찌보면 기적과도 같은 내 학창시절이다. 내가 가장 어려웠던 순간
선뜻 나를 도와준 YN이 친구(나는 이 친구를 "YN이"라고 부른다)가 나는 지금도 내 가슴에
고마움으로 남아있다. 그 친구는 지금도 대학병원에서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친구야, 그 때 고마왔다. 그 이후 나는 10수년이 넘도록 그 친구에게 연락을 못하고 있다.
언젠가 꼭 그를 찾아가야 할 것이다. 매일 사는 게 힘든 탓도 있겠지만 나의 게으름도
한몫 하는 것 같아 쑥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