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병원 수술실 드레싱카트 위엔 오래된 가위가 하나 있다.
그러니까 1980년인가 구입하였으니 무려 29년이 된 가위다.
철강가위라 아직도 가위의 날이 처음과 같이 변함없이 예리하다.
튼튼하여 딱딱한 물건을 자를 때 사용한다. 이 가위를 홍콩가위라고
부르는 까닭은 당시 선친께서 외국에 계시다 귀국하면서 홍콩에서
사셨기 때문이다. 외과를 전공하는 아들에게 줄 선물을 고르다가
가위가 눈에 들어와 사셨단다.

필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사실상 독립하였다.
졸업이후 한번도 부모로부터 학비나 생활비를 받아본 기억이 없다.
의과대학을 다닐 때도 그랬고 결혼할 때도 그랬으며 개업할 때 역시
부모로부터 단돈 10원도 혜택을 받지 않았다.
딱 하나, 아버지가 나에게 준 유일한 선물이 바로 이 가위다.
받을 때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나 세월이 흘러 이제는 나의 가장
오래된 소장품이 되었다. 그것도 부모님이 주신 귀한 물건이 되었다.

어릴 때 아버지는 엄하게 우리들을 길렀다. 늘상 회초리와 벌이었다.
한번은 게으르고 용맹하지 못하다고 시골 뒷산에 삼형제
(당시는 삼형제였고, 지금은 사형제이다)를 데리고 올라갔다.
장복산 꼭대기 천자봉을 넘어서 아버지는 수십 kg의 바위를 등에 매고
내려오시고는 화단에 "노력"이라는 글을 새겨 비석처럼 세워놓고,
아침저녁으로 큰 소리로 복창하도록 하였다. 이를테면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음을 자나깨나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다.
공부는 항상 1등해야 했고 모든 일에 남에게 져서는 안되었다.
정말 나는 늘 1등했고 무슨 일을 해도 남들에게 져본 적이 없었다.

나는 부모로부터 스스로 노력해야 살아갈 수 있다는 산 교육을 받은 것이
사실 부모로부터 받은 전부였다. 등록금도 내 스스로 벌어야 했고,
결혼도 알아서 해야 했고, 개업도, 그 어떤 일도 내 스스로 노력하여
헤쳐나가야 했다. 아버지에게 그런 용기와 신념을 물러 받은 것이다.
오직 하나 이 가위만을 빼고는....

그런 아버지도 여든살이 되셨던 지난 2006년도에 암으로 돌아가셨다.
생전에 나는 아버지께 그리 잘 해 드리지 못하였다. 외과의사 수입으로는
그 흔한 해외여행 한번 제대로 보내 드리지 못했고, 치아가 성치 않아 보기에
딱했는데 미루다 결국 금니로 바꿔드리지 못했다. 겨우 매달 생활비만
빠트리지 않고 부치는 정도였고 일년에 서너번 찾아 뵙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별로 내색하지 않으셨다. 별 기대를 하지 않으셨는지
돌아가실 때 까지 이런저런 불평을 들은 기억이 별로 없다.
돌아가신 뒤 내가 불효자였음을 많이 느꼈으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나는 수술실에 덩그렇게 놓여있는 홍콩가위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지난 시절 아버지의 말씀을 매일 되새긴다.
"노력해라,노력해라,항상 노력해라" 라고 주먹을 불끈 쥐고 우리들에게
가르치시던 그 옛날 모습을...그 아버지가 가끔 보고 싶다.
그러나 한번 가신 부모님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생전에 효도"라는 말이 그래서 하는 말인가고 이제 깨닫는다.
가끔 가위를 어루만지면서 돌아가신 아버님의 체온을 느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