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육이오전쟁이 채 끝나기 전인 1952년 겨울철, 동지섣달,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밤,영월 엄씨인 어머니와 김해 김씨인 아버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나는 갓난아이때 부터 무척 순했다고 한다. 영리하고 많은 재주를 가진 어머니는
애지중지 큰 아들을 키운 것 같다. 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배운 집짓는 기술로 당시에
제법 톡톡히 돈을 벌었고 우리는 동네에서 좀 잘 사는 축에 들었다.
집도 여러채 였고 옷이나 먹는 게 그 때 전후(戰後)의 형편으로 보면 꽤 괜찮은 편이었다.
그런데 전쟁 통에 육군통신병으로 백두산까지 진격했던 아버지가 졸지에 인해전술을 쓴
중공군에 밀려 남으로 퇴각하면서 원대복귀를 하지 않으면서 문제가 생겼다. 아버지는
졸지에 도망병이 되어 가족을 이끌고 피신하는 처지가 되었고 원치 않는 타향살이가 시작되었다.

우리가족은 경북안동으로 갔다. 나는 그곳에서 유치원과 초등학교 1학년을 다녔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했고 나를 자주 자전거 뒤에 태우고 안동시내를 다녔다.
하루는 얼큰하게 취한 아버지가 뒤에 태웠던 아들이 집에 와보니 없어진 것이다.
난리가 났다. 하늘로 사라진 건가, 아니면 누가 잽싸게 훔쳐가기라도 한건가...
어머니는 발을 동동 굴렀단다. 하는 수 없이 아버지는 왔던 길로 다시 자전거를 몰았단다.
아니나다를까 신작로 저 멀리서 얼굴이 눈물반 땟국반으로 얼룩진 내가 엉엉 울면서
오더란다. 너무 흥이나서 자전거를 몰았던 아버지가 내가 떨어지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또 하루는 자전거에서 내린 뒤 내가 자전거 뒤에서 긴 작대기를 입에 물고 서있다가
그만 아버지가 갑자기 차를 뒤로 세우던 중 작대기가 내입 속으로 꼽히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당시 안동도립병원에서 근무했던 아버지는 부랴부랴 병원 원장(백원장 이었던 같다)에게
데려갔고, 입속을 찬찬히 보던 원장은 소독약을 입에 머금었다가 뱉으라고 했는데,
절반은 마시고 말았다. 어린 나는 구역질과 통증으로 그날 밤 무척 고생했던 기억이 있고,
그 때 다친 상처가 내 입술 아래 흉터로 남아있다.

도립병원에서 아버지를 따라서 운동장에 어린 내가 놀고 있으면 아저씨들이 몰려와
이름을 써보라, 나이를 써보라는 등, 제법 영특했던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을 즐거워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대견스럽게 여겼고 내심 자랑꺼리로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1학년 때 안동동부초등학교에서 진해 경화초등학교로 전학을 했다.
나의 성적은 별로 였다. 나는 안동사투리를 많이 썼는데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많이 당했던
기억이 있고 그래서 인지 3학년까지는 별 신통치 않았다. 부모의 기대를 저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3학년 때, 여선생님이 담임으로 오셨고 이분이 내가 태어날 때 출산을 도와준
S산파 집에서 하숙하면서 나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왜냐면 3학년 때 처음으로
우등상이란 것을 탔기 때문인데, 담임선생의 노력이 절대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즉 원래 7명인가 밖에 주지 않았던 우등상을 특별히 8등을 한 나에게 그해 담임재량으로
준 것이다. 그런데 훗날 나는 말실수를 하여 이 선생님으로부터 엄청 벌을 받기도 했다.
뺨을 10대도 더 맞았던 같다. 그래도 나는 이 여선생님 덕택에 생전 처음 공부 잘하는
학생대열에 들어가게 되었다.

4학년 때는 성적이 좀더 올랐으나 워낙 담임선생님이 깐깐하여 학업에 별 흥미를 갖지 못하고
4학년 마칠 때 친구들과 장난 친게 화근이 되어 매우 힘든 벌을 받기까지 했다.
그런데 5학년 때부터 나는 급진적인 발전을 하였다. 이유는 나에 대한 새 담임선생님의 각별한
관심과 노력 때문이었다. 나는 5학년 때 반에서 3등 안에 들어 갔고 그 해 졸업식 때 재학생을
대표하여 송별사를 낭독하기도 했다. 급기야 6학년 때는 부급장에 올라갔고 학교 배구대표선수와
축구골키퍼까지 하는 행운을 얻었다. 학교성적은 거의 10위권 안이었다. 서서히 나의 잠재되었던
학업성취능력이 표출되던 시기였다. 졸업할 때는 중학교 수석까지 학교에서 기대하던 정도 였는데,
아깝게도 나는 진해중학을 차석으로 들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전기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같고 그 계기는 담임여선생님의
조그만 배려에서 시작하였다고 생각한다. 조금 부족하지만 담임은 나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억지로 우등상까지 만들었던 것이다. 비록 철없던 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바람에
그 선생님과의 돈독한 관계는 산산히 부셔지고 말았지만 나는 아직도 그 선생님을 잊을 수가 없다.
안동사투리로 따돌림을 당하여 항상 수줍어하고 외톨이 였던 어린 나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가지도록 도움을 주신 그 여선생님은 나에게는 작은 천사나 수호신과 같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살아계시면 일흔은 되셨을 텐데 한번 뵈었으면 하는 맘이 그지없다. 그
리고 말을 조심해야 함을 가르친 그 분의 분노를 나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