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대망의 부산의 명문 경남고에 입학하였으니 그 때가 1968년이다.
우리학교는 동대신동에 위치했고 구덕산(九德山)  산기슭의 숲속에 자리했다.
처음 부산에 도착한 날, 부산진역에서 내려, 그 유명한 전차(남전 ,南電이라고 불렀음)를
타고 대신동까지 갔다. 당시 1~2원하면 탈 수 있었는데 종이회수권을 차장아저씨에게
내고 차안에 서있으면 되었다. 애석하게도 이 전차는 내가 2, 3번 타지도 못하고
폐차하였는데, 그 당시 무려 54년의 역사를 가진 부산의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최근에 동아대 캠퍼스에 1량을 보관, 다시 시민들에게 공개한단다.

우리학교는 그 당시 경남지방의 수재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나의 진해는 물론,
마산, 진주, 남해, 울산,...지방 중학교 상위 1~5등하는 학생들의 꿈의 학교였다.
지금도 그때의 지방출신 친구들이 졸업한 지 38년이 지났어도 친구로 왕래를 하고 있다.
1학년 때에는 촌뜨기 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부산은 일본과 가까워 매우 세련된 곳이었다.
일본의 어느 큰 도시와도 같이 왜색문화가 번창하던 곳이라고 보면 되었다. 나는 일찌감치
일본공부를 시작했다. 일어학원에 다니면서 일본어에 친숙했고, 일본수학(차트식수학)을
독학으로 배웠고 이것이 수학공부에 결정적 도움이 되었다. 나는 수학에 있어서는
우리학교에서 둘째 가라면 서운할 정도로 잘 했다.

부산은 바다의 도시이기 때문에, 바다를 생각하지 않으면 부산을 설명하기 어렵다.
넓은 해운대와 동백섬, 그리고 최치원의 바윗글, 밀물때와 썰물때에 섬의 갯수가 달라지는
오륙도, 싱싱한 바닷고기가 넘쳐나는 자갈치시장, 울창한 숲과 파도가 구비치는 태종대,....
또, 지금은 부산국제영화제로도 유명한 남포동의 야경, 내가 자주 드나들던 헌책방 보수동
뒷골목, 하루에 두번 들어올렸다 닫혔던 영도다리......서울의 남산타워처럼 탑이 우뚝선
용두산공원....부산은 좁고 긴 도시지만 그 정취는 여느 도시보다 아기자기하다.

당시 우리학교는 야구를 교기로 하여 전국적으로도 유명했다. 청룡기는 무려 8번의 우승으로
최다승했고, 황금사자기도 6회 우승했다. 불행하게도 내가 다니던 시절에는 경북고의
임신근 투수가 맹활약하여 결승진출이 매번 좌절되었다. 구덕운동장에서 야구응원을 한 날은
모두 교가를 외치고 응원가를 목이 쉬도록 불렀다. "이 세상에 경고 없이는 무슨 재미로...
해가 떠도 경고,..." 이런 응원가는 지금 불러도 그 때의 흥분을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

나는 하숙을 했기 때문에 일요일엔 집에서 쉬곤 했다. 그런데 새벽부터 바깥에서는
요란한 소리들이 들려온다. 새벽잠에 취해 있을 때 "재칫국"이라는 특유의 외침과 함께
재첩국장사 아줌마가 골목을 누빈다. 숙취에 재첩국이 좋기 때문이다. 민물에 서식하는
강조개인 재첩을 삶은 물엔 타우린 (박카스의 성분)이 풍부하여 엣날 동의보감에도 나오는
숙취제거음식이란다. 아침을 들고 나면 "뻔"하는 뻔데기 장사소리, 이어서 엿장수아저씨의
가윗소리, 또 "퍼-"하는 오물제거아저씨 소리....저녁이 가고, 밤이 오면 "딱딱"하는
안마아저씨의 소리가 나고, 이어서 "찹 싸-알 떡"소리가 야밤을 휘젓는다. 겨울철 먹는
찹쌀떡의 맛은 참으로 진미중에 최상이다. 그리고 자정을 넘겨서는 호각소리, 급하게 뛰는
발자국소리....그리고 마지막으로 멀리 구덕산에서 들려오는 뻐꾸기소리인지, 처량한 새소리가
들릴 듯 말듯 처량하게 내 귀를 스치면 나는 잠에 빠졌다.

우리학교는 원형건물(덕형관)으로 유명했는데, 2학년 때에는 이 곳에서 공부했다.
다소 공부하는 분위기가 산만해지는 단점도 있었다. 또 나는 도서관반장과 3학년 때에는
반장을 하여 학교운영을 이끌었다. 당시에 같이 활동한 친구들 중에는 국회의원도 여럿있고,
대학교총장, 은행장, 대도시 시장, 장관급공무원,...등등이 지금 많이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건축가인 S군은 내가 서울대 건축학과를 극구 권하여 미술대를 가지않고
결국 한국 최고의 건축가가 되었다.

구덕산은 왕을 점지하는 산이라고들 했고 드디어 선배중에 대통령도 나왔다.
그 때 40대 기수론을 들고 모교를 방문하여 전교생을 앞에두고 그 예의 쉰 목소리로 웅변을
하던 김영삼 전대통령이 지금도 기억 난다. 유달리 우리학교 출신 중에 국회의원들이 많다.
친한 친구들 중에도 여럿 있으니 우리학교는 정치 1번지의 고향인가 보다. 내가 정치에 뜻이
있었다면 혹여 나도 지금쯤 금뱃지를 가슴에 달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당시에 같이
반장회의에 참석했던 친구들이 지금 국회의원이나 대사, 장차관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3학년 때는 반장을 하였고 지금도 석다회 (3-5반 모임,石多會)란 모임으로 서울에서 계속 만난다.
담임이셨던 S 영어선생님과도 계속 연락을 닿고 있다. 우리 반창회는 만나면 모두 매우 즐거워하고
화기애애하다. 다른 반 친구들이 모두 부러워한다는 후문이다. 3학년 때 나는 전교에서 수학을 1등 했다.
그래서 우리 반에서도 늘 1등이었다. 우리학교에서는 매년 서울대에 130여명 가까이 입학했으니
당시로는 내가 수재이긴 틀림 없겠다. 우리학교 대표로 수학경시대회에 나가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3학년 후반기 예기치 않은 병마로 나는 쓰러져 그만 학업을 포기하고 오랜 투병생활로
들어가는 불운을 맞았다. 훗날 이런 가슴아픈 과거가 내 삶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지만 당시로는
나에게는 절망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건강은 그래서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건강을 잃으면 재산도, 가정도, 학벌도, 천재성도 모두 물거품이 된다.
건강을 기초로 해야 성공이 온다. 그래서 나는 아픈 사람들의 건강을 지켜주는 "건강지킴이" 로서의
나의 역할에 작지만 나름의 책임과 아울러 자부심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