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1979년 10월에 서울에 올라 와 인턴시험을 치루었다. 그러니까 10월 26일 밤,
대구에서 서울로 상경하여 국립의료원 인근의 여관에 여장을 풀고, 다음날 있을 시험에
대비하기 위해 대학동기생들끼리 합숙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이 그 유명한 "10-26 사태"가 일어난 바로 그날 밤이었다.
한밤 중에 마지막 시험예상문제를 검토하고 있던 중 육중한 트럭들이 우루루 굴러가는
소리가 을지로 6가를 진동하여 좀 의아스럽게 생각했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소리는
탱크들이 궁정동으로 향하는 소리였다.

당시 유신말기에 접어들어 10월 16일에는 부마항쟁이 일어나고 18일에는 부산지역에
비상게엄령이, 연이어 20일에는 마산-창원지역에 위수령이 내려지던 급박한 상황이었다.
미국과는 핵개발과 코리아게이트사건(P씨 관여)등으로 관계가 날로 악화되어 한치 앞을
내다 보기 어려운 시기였다. 그날, 10월 26일,내가 백병원 인턴시험준비를 하던, 바로
그날 밤, 거사가 일어나 김재규등이 故박정희대통령을 시해한 날이었던 것이다.

10월 27일, 우리들은 아무것도 모른 체, 대학병원 강당에서 영어시험과 필기시험을 치뤘다.
다행히 필자는 영어최우수성적, 필기차석으로 합격했다. 다음날, 면접시험 때 P원장이 물었다.
"어떻게 영어공부를 하였는가?"고, 그래서 특별히 공부한 것은 없다고 했다.
타임즈지를 읽었느냐기에 그냥 이것저것 공부했다고 했다.

인턴생활은 그야말로 24시간 서서 일하는 생활이다. 응급실에서,당직실에서, 병동에서,
수술실에서 하루종일 콜(call) 받는 게 주요 일과다. 아예 페이징(paging)이 하루종일
방송을 통해 나를 찾는다. 잠은 하루 평균 3~4시간, 그것도 짬짬이 눈을 붙이는 식의
새우잠으로 때운다. 나는 지금도 식사를 매우 허겁지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인턴 때
몸에 붙은 습성이다.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입속에 쑤셔 넣는다 라고 보면 정확하다.
그나마 그것마저 놓치면 하루종일 입에 풀칠도 못하기 일수기 때문이다. 다리가 퉁퉁 붓는
것은 기본이고 허리에 무리가 와 나는 결국 레지던트 때 6개월간을 몸져 누워 지내기도 했다.

외과의국은 전쟁터의 패잔병 휴식소와 흡사하다. 만약 미화아줌마가 하루라도 정리하지
않으면 마굿간과 진배없다. 당시 우리병원은 잘 나가던 병원이었기 때문에 수술은 매일
수건씩 있었고 11명의 레지던트가 소화해 내기에는 벅찬 업무량이었다.
4년차가 되면 전문의시험 준비로 의국의 일선에서는 물러나고 1년차는 아직 기초를 잘 몰라
우왕좌왕하기 일수 이므로 결국 2, 3년차가 핵심멤버로 일한다. 1년차는 온갖 잡일과
환자주치의로 환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챙겨야 한다. 3년차는 의국장으로 의국을 총지휘한다.
만약 의국장이 유능하고 스탭과 손발을 잘 맞추면 의국분위기가 좋지만, 의국장이 리더쉽이
부족할 때에는 매일매일이 살얼음판이 된다. 회진 중에 혼나는 것은 말 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는 수술집도를 꿈꾸기도 어렵다. 또 어느 한 사람이 자질이 너무 떨어지면 나머지
사람들이 힘들어 진다. 거꾸로 어느 한 사람이 특출나게 발군의 실력을 보이면 과장의
사랑을 독차지해 나머지는 늘 찬밥신세가 되기 쉽다.
그래서 의국생활은 군대생활, 즉 병영생활과 흡사한 점이 많다.

외과수련의들은 사실 지나치게 혹사 당한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요즘은 인기가 없고
지원하는 사람들도 거의 없다고 한다. 외과전문의가 되어도 장래성이 없고 자칫 의료사고에
휘말리기 쉬워 매년 대학병원은 외과수련의 모셔오기에 진땀을 빼는 것 같다.
아마 머지않아 외과의사를 수입해야 할 날이 오리라 본다.

그래도 우리가 의국생활을 하던 80년대만 하더라도 아직 외과의 전성기가 끝나지 않았던 때이라
의국요원들의 숫자도 많았고 한번 회식을 가면 무도회장은 우리들의 독차지였다. 자정이 될 때까지
흥겹게 춤추고 술 마시며 쌓인 스트레스와 피로를 푸는 것이 우리 의국의 중요한 행사 중에 하나였다.

의국에는 항상 수많은 전설들이 구전되어 내려오고 있었다. 우리의국 과장님은 서울대수석졸업에
전국에서 가장 똑똑한 의사로 소문나 있었고 수술 잘 하기로도 전국에서 두번째 가라면 서러워했던
양반이다. 의국 총 우두머리는 P 원장인데, 백인제 초대원장의 조카로 인제대학교를 만들었고
한국에서 가장 이름난 의료인 들 중에 하나로 지금도 의료계가 다 인정하는 어르신이다.
우리 의국 출신들 중 현재 경찰병원원장도 있고 한국 간이식수술에서 세손가락 안에 드는 W교수도
있고, 의사생활을 접고 목사로 전업한 분도 있으며 아예 고향에서 물고기양식사업을 하는 사람도 있다.
또 충청도의 유명한 대학교총장님도 계신다.

의국에서는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들도 간간 흘러 나온다. 의사와 간호사끼리의 결혼이다.
우리 의국엔 두 사람이 같은 병원간호사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모두 개업하면서 잘 살고 있다.
의국은 그래서 참 흥미진진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