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소속되었던 군단특공대는 사시사철 훈련이 끊이지 않았다. 
봄에는 천리행군, 여름에는 해안침투훈련, 가을에는 체육대회,
겨울에는 혹한기훈련이 연이어 있었다.

1985년 겨울, 우리 특공대대는 인근 광교산으로 겨울훈련을 떠났다.
광교산은 수원시를 둘러싼 580여미터의 산으로 풍덕천이 흐르고
겨울에는 눈이 아름답게 쌓이는 산으로 유명하다. "광교적설"(光敎積雪)은
이를 두고 부르는 말이다. 여름철이나 가을철에 이곳을 오면 개울도 예쁘고
작은 폭포(와폭)도 있어 하루 산행으로는 최상이다. 그러나 그해 겨울, 훈련을
받던 그 날의 눈은 한평생 잊을 수 없는 공포의 눈이 되었다. 훈련을 마치고
귀대하는 순간, 우리 군용 앰블란스가 산 속에서 그만 고장이 난 것이었다.
그래서 의무병과 책임자인 군의관 나, 이렇게 둘은 밤새 눈이 펑펑 내리는
광교산 눈 속에서 밤을 새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밤의 찬기후가 그렇게
매서운 줄은 미처 몰랐다. 몸을 따스하게 데워줄 아무 도구나 방법이 없었다.
성냥불도 켜보고 얼어가는 두손을 열심히 부벼 보아도 금방 싸늘해졌다.
정신은 몽롱해지고 여기가 산인지 어딘지 방향감각도 서서히 무뎌져 갔다.
배는 고프고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온통 하얀 눈 밖에 보이지 않으니....
히말라야등정 중에 산속에서 동사하였다는 이야기가 바로 이런거구나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추운 광교산에서의 밤을 하얗게 샌 후 드디어 아침 햇살이
비치고 멀리서 동이 트기 시작했고 그렇게 매섭던 야밤의 산의 냉기가 저만치 물러났다.
군대에서의 생존은 극기훈련과 사고에서 무사하면 가능하다는 것을 체험한 하루였다.

1987년 제대를 채 1년 남기기도 전, 군단의 지휘영역 안에 있던 휴전선철책으로
진료를 나갔다. 강화도의 포대지역이었는데, 이곳 병사들은 1년에 겨우 몇번만
하산할 수 있을 정도로 행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나는 이들 고생하는 병사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했다. 당시 유행하던 포경수술을 하러 그 곳으로 간 것이었다.
제대준비 중이던 7~8명의 병장에게 좀 아프지만 귀한 포상수술을 하러갔다.
당시 강화도로 들어가려면 좁은 강화교를 통과해서 갔고, 강화시장을 거쳐 북으로
끝없이 비포장도로를 달리면 철책이 나타났다. 대공포대 진지가 보이는 산 속에서
무려 한나절동안 고래잡는 수술을 하였다. 수술이 끝나자 선임하사가 고맙다는
표시로 나에게 선물을 주었다. 유명한 "강화수삼"이었다. 원래 강화도는 인삼산지,
특히 6년산 인삼이 나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수삼을 한보따리 선사받은
필자는 이 귀한 삼을 술에 담가 오랫동안 고맙게 마셨다.

부대 안에서는 병사들만 치료하는 게 아니다. 장교는 물론 사모님들의 진료도
똑같이 했다. 필자는 수액(영양제)을 잘 놓는 것으로 소문나, 몸이 불편한 사모님들의
부탁이 적잖이 있었다. 한번도 사양하거나 피한 적이 없었다. 간단한 수술은 멀리
민간병원을 찾는 대신 부대 의무실에서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고 실장인 나는 "혹수술"을
잘하는 것으로도 제법 알려진 모양이었다. 군복무동안 국가를 지키기 위해 고생하는
군인들을 위해 이정도 봉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나는 되도록 많은 수술과
진료를 하려고 노력했다. 항상 내가 있는 그 곳이 내가 최선을 다해야 하는 숭고한 사명의
장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대가는 미미하겠지만...보답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내 의사인생을 얼마나 성실하고 보람있게 사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가 진정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